대중차를 넘어 운전의 재미를 탐하다
앞서 현대자동차가 제네시스 브랜드를 통해 '럭셔리' 시장에 안착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탑클래스 완성차 제조사로 완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바로 자동차 기술력의 집약체이자 전 세계 마니아들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고성능 브랜드'의 구축이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AMG, BMW의 M처럼 브랜드를 대표하는 고성능 라인업은 단순히 비싼 차를 파는 목적을 넘어, 그 제조사의 공학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전 세계에 증명하는 자존심의 상징입니다.
사실 과거의 현대차는 평범하고 무난한, 이른바 '출퇴근용 가성비 차'를 잘 만드는 회사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주행 감성이 다소 심심하고, 급격한 코너링이나 고속 주행 시 하체가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현대차는 자동차 본연의 달리기 성능과 '운전의 재미(Fun to Drive)'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남양연구소(Namyang)와 독일 뉘르부르크링(Nürburgring) 서킷의 앞 글자를 딴 고성능 브랜드 'N'을 2015년 전격 출범시켰습니다.
뉘르부르크링 가혹 조건과 WRC 모터스포츠에서 얻은 피와 살
고성능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마력 수치만 높인 엔진을 얹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높은 출력을 버텨내는 차체 강성, 정밀한 조향 시스템, 강력한 브레이크 성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제어하는 하체 세팅 역량이 필수적입니다. 현대차는 이 노하우를 얻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서킷으로 불리는 독일 뉘르부르크링에 훈련 캠프를 차렸고, 전 세계를 돌며 거친 오프로드를 달리는 'WRC(세계 랠리 챔피언십)'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모터스포츠 무대는 잔혹했습니다. 초창기에는 경주 도중 차체 뼈대가 부러지거나 엔진이 과열되어 멈춰 서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포기하지 않고 서킷에서 터져 나온 결함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했습니다. 코너를 돌 때 타이어가 접지력을 잃는 순간의 압력 데이터, 급제동 시 브레이크 패드가 버텨내는 한계 온도 등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차량을 계속해서 보완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지옥 훈련의 결과로 탄생한 'i30 N'과 '벨로스터 N'은 글로벌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럽의 자동차 저널리스트들로부터 "전통의 강자들을 위협할 만큼 코너링 성능이 날카롭고 운전이 즐거운 차"라는 극찬을 이끌어내며, WRC 무대에서도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경주차의 기술이 내가 타는 일반 양산차로 흐르는 과정
많은 사람이 "모터스포츠나 N 브랜드는 서킷을 달리는 특수한 차일뿐, 우리가 타는 일반 아반떼나 쏘나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큰 오해입니다. 레이싱 무대와 고성능 N 라인업을 개발하며 얻은 방대한 공학적 데이터와 부품 제어 기술은 'N 트랜스퍼(N Transfer)'라는 과정을 통해 고스란히 우리가 타는 일반 양산차의 기본기를 올리는 데 쓰입니다.
예를 들어, 코너를 돌 때 안쪽 바퀴와 바깥쪽 바퀴의 회전수를 전자적으로 제어해 주행 안정성을 극대화하는 'e-LSD(전자식 차동 제한 장치)' 기술이나, 차체 뒤틀림을 막아주는 구조용 접착제 적용 범위 확대, 급가속 시 변속 충격을 줄이면서도 체결감을 높이는 로직 등은 모두 모터스포츠 데이터에서 유래해 일반 차에 이식된 기술들입니다. 덕분에 최신 현대차들은 N 브랜드 출범 이전과 비교했을 때 하체가 단단해지고 조향감이 획기적으로 묵직해졌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고성능 연구가 브랜드 전체의 기술적 상향 평준화를 이끌어낸 셈입니다.
내연기관의 N DNA가 최첨단 고성능 전기차로 진화하기까지
이제 자동차 시장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EV)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배터리 때문에 차체 중량이 크게 늘어나는 전기차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고성능 N 브랜드가 서킷과 랠리에서 쌓아온 '하체 제어 및 내구 노하우'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엔진 소리가 사라진 전기차에서 어떻게 운전자의 아드레날린을 깨울 것인가에 대한 현대차의 해답이 바로 최근 출시되어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는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 5 N'입니다.
아이오닉 5 N에는 내연기관 고성능 차의 변속 느낌을 그대로 재현한 가상 변속 시스템(e-Shift)과 서킷 주행 시 배터리 온도를 최적화하는 첨단 열관리 센서 데이터 기술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과거 뉘르부르크링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내연기관의 열을 식히고 차체를 제어하던 엔지니어들의 집념이 없었다면, 고전압 배터리를 얹고 시속 250km가 넘는 속도로 서킷을 연속 주행해도 지치지 않는 괴물 같은 전기차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모해 보였던 서킷에 대한 도전은 이제 전기차 시대의 고성능 패러다임을 리드하는 독보적인 경쟁력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핵심 요약
현대자동차는 무난한 출퇴근용 차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달리기 성능의 정점을 증명하기 위해 고성능 브랜드 'N'을 출범시켰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뉘르부르크링 서킷과 WRC 랠리 무대에서 차량의 한계 데이터를 수집하며 고성능 파워트레인 및 하체 제어 기술을 확보했습니다.
모터스포츠를 통해 검증된 e-LSD, 차체 강성 강화 공법 등은 일반 양산차에도 적용되어 현대차 전체 라인업의 주행 기본기를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가혹 조건에서 축적된 하체 세팅 및 열관리 데이터는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 5 N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미래 전동화 고성능 시장을 선도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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